한국 유기농의 아버지
풀무원농장을 풀무로 삼아 ‘생명존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확산하는 ‘풀무질’에 한평생을 바쳤습니다.

원경선 원장님의 ‘풀무질’ 이야기

  • 1원 50전의 기적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원경선 원장님은 장학금을 받아 보통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 형편에도 장학금을 아껴서 남은 돈 1원 50전을 후배들을 위해 모교에 반납함으로써 일본인 교장을 감동시켰습니다.
  • 일요일에 생긴 일
    원장님은 보통학교 졸업 뒤 군청으로부터 영농자금을 지원받아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군청의 농장 시찰 등으로 신앙 활동이 방해를 받게 되자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왔습니다. 목장의 목부로 일하게 된 원장님은 새벽 2시 반부터 5시까지 일하고 저녁에는 다시 신학교 진학을 위해 공부를 했습니다. 잠은 길어야 3시간!
  • “지금 가세요?” 그 한 마디 때문에
    자전거로 우유 배달을 마치고 광화문을 지나가다가 원장님은 한 여성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지금 가세요?” 같은 교회의 교인이나 특별히 인사는 없었던 사이였습니다. 원장님의 아내가 되는 지명희 여사. 배화여고보를 졸업한 신여성 지명희는 우유배달부에게 먼저 마음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 분들은 1938년 혼인했습니다.
  • 북경으로 간 신혼부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원장님 내외는 결혼 이듬 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사업을 했습니다. 지명희 여사님의 성씨 ‘지’와 원장님의 성씨 ‘원’을 붙여 ‘지원인서사’라 이름한 인쇄소를 열었습니다. 납기일 준수, 완벽한 일처리… 북경에서 금방 일 잘하는 인서사로 소문이 났더랍니다.
  • 내 무덤을 보고 되돌아왔다
    1946년 귀국한 원장님은 꽤 자유로운 영어 덕분에 주로 미군정의 토목공사를 따오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접대하고, 뇌물 주고… 싫어도 그렇게 해서 굴러 갔습니다. 돈은 원없이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트럭 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원장님은 그때까지의 껍데기 삶을 갈아엎기로 했습니다.
  • 농부 원경선으로 돌아가서
    1949년 원장님은 사업을 접고 부천에 농장을 세웠습니다.
    다시 농부로 돌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도 토지 불하와 경작 과정에서 뇌물을 주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때 원장님은 농장 식구들에게 말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
  • 슬픔을 딛고 공동체로
    육이오 전쟁 때 원장님은 제2국민병으로 제주도까지 끌려가 전쟁의 참상을 온 몸으로 겪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농장으로 돌아오니 원장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통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전쟁고아들과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농장으로 받아들여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인간 풀무질이 시작된 풀무원농장
    녹슬고 무디어진 연장이 풀무질을 통해 쓸모있는 연장이 되듯이, 원장님은 정직한 노동과 성경의 가르침으로 못 배우고, 좀 모자라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인간 풀무질을 시작했습니다. 부천 풀무원농장이 그 터전이었습니다. 원장님 한평생의 주제인 ‘생명존중과 이웃사랑’은 그렇게 펼쳐졌습니다.
  • 지명희 여사님의 힘
    지명희 여사님은 20명이 넘는 풀무원농장의 안살림을 도맡아 했습니다. 공동체 사람들을 먹이고 가족으로 품어 안는 것이 자신의 달란트라고 지 여사님은 생각했습니다. 농사일과 공동체 살림으로 무릎 관절이 쉰에 이르러 이미 다 닳아버렸으나, 지 여사님은 원장님에게 불평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 홀트아동복지회의 홀트 씨와 원장님
    한국을 알지 못했던 미국의 한 사업가는 우연히 한국 전쟁고아들의 참상을 찍은 영상을 보고 서울로 왔습니다. 그 아이들을 돕기 위해서였죠. 해리 홀트 씨. 원장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에서 고아와 장애아들을 돌보는 홀트씨의 한평생 멘토였습니다. 그리고 친구였습니다. 그 두사람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 거창고등학교에 남겨진 원장님 생각
    학생들이 토론을 통해 자기들의 일을 결정하고, 학생과 교사가 수직 관계가 아니라 친구처럼 수평적인 학교, 자발적으로 공부하는데도 성적이 좋은 학교, 그리고 학생들이 틈틈이 농사도 짓는 학교. 원장님은 이 학교의 이사장 노릇을 50년 가까이 했습니다. 진실! 원장님은 진실을 전할 수 없으면 학교 문을 닫자고 했습니다.
  • 언제나 열려 있는 문으로
    풀무원농장에는 문이랄 것이 없었습니다. 원장님은 오고 싶은 사람은 언제건, 누구건 올 수 있도록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문없는 문으로 풀무원농장에 들어온 사람들의 인생 역정은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는 공동체 생활과 농사에 적응하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원장님은 그들을 묵묵히 기다려 주었습니다.
  • 한밤에 만난 고다니 준이치
    1975년 원장님은 일본의 농업잡지 ‘애농’에서 고다니 준이치라는 분의 글을 읽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 농사야말로 땅과 사람을 살리는 진정한 농사란 것도. 이 글을 계기로 원장님 인생의 패러다임은 다시 한번 바뀝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한국 농업사에 기록될 만한 일입니다.
  • 땅은 배반을 모른다.
    원장님은 27년 부천 시대를 정리하고, 1976년 경기도 양주로 농장을 옮깁니다. 풀무원농장의 유기농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화학비료와 농약 대신 퇴비를 만들어 쓰고, 손으로 벌레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일하고 원장님에게 돌아온 것은 누더기가 된 작물과 늘어난 빚이었습니다. 그러나 3년째 접어들자...
  • 2001년 어느 가을날의 풍경
    풀무원농장에는 나비가 많았습니다. 유기농이니 곤충이 살기에 좋았으니까요. 원장님은 가래로 밭을 갈았을 뿐만 아니라 나비채를 들고다니며 나비를 잡고, 발효시킨 퇴비를 포크레인으로 농장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현미밥을 누구보다 맛나게 지을 줄 알았습니다. 양주 농장의 농부 원경선은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 제3 세계 굶주림을 돕기 위해서
    1988년 일본에서 우연히 국제기아대책기구 행사에 참석한 원장님은 2초마다 한 명씩 이 지구 어디선가 굶어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천의 원경선은 귀국하자마자 모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풀무원 임직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분들이 풀무원 헬스어드바이저들이었습니다.
  • 리우데자네이루로 간 원장님
    1991년 6월 원장님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유엔세계환경회의에 우리나라 민간단체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그 회의에서 원장님은 스스로의 경험에 더하여 전국을 돌며 모은 유기농 정보를 외국인 청중 앞에서 발표하였습니다. 환경 오염에 대응하는 새로운 해법으로 유기농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 유엔이 글로벌500상을 수여한 이유
    유엔환경계획은 5년마다 한 번씩 환경운동에 공로가 큰 사람에게 글로벌 500상을 수여합니다. 상금도 특혜도 없지만 사회운동가들에게 더없이 영예로운 상입니다. 원장님은 유기농으로 그 상을 받은 최초의 수상자입니다. 1995년의 글로벌 500상은 원장님을 위해 유기농 부문을 신설했습니다.
  • 풀무원농장무공해농산물직판장을 아시나요?
    유기농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건강한 먹거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양주 풀무원농장으로 찾아왔습니다. 주로 강남의 부인들이었습니다. 원장님의 아들 원혜영은 유기농의 가치를 상품화하면 더 널리 대중에게 이 좋은 것을 보급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서울 압구정동에 ‘풀무원농장무공해농산물직판장‘을 열었습니다.
  • 풀무원 두부, 풀무원 콩나물은 처음부터 달랐다
    압구정동 가게에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고 단골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80년대 초 유기농 재배 수준은 날씨에 너무나 민감하여 수요에 적절히 대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를테면 비가 많이 오면 채소가 녹고, 가물면 말라버려 매대가 텅텅 비었습니다. 풀무원의 두부와 콩나물은 그런 고민의...
  • 풀무원 현미 효소 - 가게에서 기업으로 가는 길목
    풀무원이 초기에 회사의 모양을 갖추는 과정에는 제품으로는 유기농 현미 효소, 사람으로는 남승우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평생의 주제로 삼아온 ‘생명존중과 이웃사랑‘을 브랜드 정신으로 삼고 ‘바른먹거리‘로 풀무원을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켜나가는 남승우를 원장님은 깊이 신뢰하고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 세계평화를 꿈꾸며
    2004년 봄 원장님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평단리로 이사했습니다. 풀무원이 만년을 보내실 거처와 농장을 거기 마련한 것입니다. 괴산으로 옮겨온 공동체를 원장님은 평화원이라 했습니다. “일용할 양식만 남기고 다 나누면 군대도 전쟁도 없다.“ 원장님 만년의 집중은 평화였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원경선은 바르게 살았다.’ 하는 것을 남기고 싶어.”